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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워커힐 빛의 시어터 : 구스타프 클림트, 골드 인 모션 전시

by 포지티브먼데이 202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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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전시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는 환상적인 경험의 전시

본 전시는 몰입형 예술 전시로 19세기말부터 빈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이 걸었던 길을 돌아봅니다. 한스 마카르트, 오토 바그너,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의 작품을 통해 색채의 근원적인 역할과 새로운 형태의 색을 찾기 위한 노력을 보여줍니다. 

 

 

참여 작가 소개

구스타프 클림트(1862.07.14 ~ 1918.02.06)

구스타프 클림트는 20세기에 종합적인 예술 표현 부흥을 이끈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그의 작품은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서양 미술사에 독특한 위치를 구축했습니다. 20세기 초는 그의 황금기로써 <물뱀(Water Serpents)>,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Portrait of Adele Bloch-Bauer)>, <다나에(Danae)> 등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브뤼셀 스토클레 궁전에 모자이크 양식의 프레스코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에곤 쉴레(1890.06.12 ~1918.10.31)

에곤 쉴레는 어릴 때부터 드로잉에 큰 흥미를 보였습니다. 17세에 당시 45세였던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났고, 이 만남을 통해 그는 클림트를 인생의 멘토이자 정신적 가이드로 삼았습니다. 이들의 교감은 상호적이었으며 클림트의 후원 덕분에 쉴레는 빈의 아방가르드 화단에 발을 디딜 수 있었습니다. 쉴레는 특유의 독특한 인물 묘사로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그의 짧았던 작품활동이 마무리될 무렵에는 풍경화와 정물화를 주로 그렸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표정과 뒤얽힌 신체를 담은 그의 초상화는 점점 더 현실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는 20세기 초 가장 유명한 비엔나의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스 마카르트(1840.05.28 ~ 1884.10.03)

한스 마카르트는 오스트리아의 장식화가로 빈 미술 아카데미와 뮌헨에서 공부했으며, 19세기 후반 그는 오스트리아 상류사회에서 각광받는 장식화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감각의 화가(painter of the senses)"라고 불린 마카르트는 과장되고 관능적이면서도 극히 장식주의적으로 묘사된 작품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자신의 제자였던 구스타프 클림트와 빈 미술사 박물관에 전시한 그의 장식 작품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위대한 역사의 한 장면, 정물화, 초상화, 우화 등을 그린 마카르트는 부유한 의뢰인들을 주요 축으로 "마카르트 스타일"을 창시하며 서양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오토 바그너(1841.07.13 ~ 1918.04.11)

오토 바그너는 현대 건축의 선구자 중 한명입니다. 피렌체 르네상스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그의 건축양식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80년경 그는 아르누보를 받아들이고 1896년에는 건축설계에 기능성과 심미성을 조화시킨다는 현대 건축 철학을 제시한 저서인 <근대건축(Modern Architektur)>을 출간했습니다. 또한, 도시계획에 매료된 그는 현대 도시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바그너 덕분에 지하철(Stadtbahn)과 우편 저축은행 본사(Postparkasse) 같은 주요 도시화 프로젝트가 빈에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전시 구성

첫 번째, 빈 신고전주의/ 어둠 속에서 빈 미술사 박물관이 서서히 등장하고 뒤이어 클림트와 마카르트의 신고전주의 프레스코화가 차례로 나타납니다. 작품과 건물 간에 이어지는 이 대화는 부르크 극장의 기념비적인 천장 장식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신화적 해석이 들어간 프란츠 마치의 풍부하고 시적인 그림들은 과거 문경의 영광을 기리는 듯합니다. 그에 반해 젊은 세대였던 클림트는 이와 같은 빈의 '세기말적인' 유행에서 벗어나 또 다른 예술적 접근을 시도합니다. 

 

두 번째, 클림트와 빈 분리파/ 1897년 빈 분리파 전시관은 예술 부흥을 목표로 하는, 새롭고 창의적인 비엔나 예술운동을 위한 전시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전시관의 유려한 외관은 황금으로 장식되어 호화로움을 더합니다. 빈 분리파가 발행한 잡지의 표지와 전시의 포스터 등에 사용된 그래픽 디자인은 당시 새로운 소통의 수단으로 여겨지며 머지않아 예술 표현의 또 다른 방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오스트리아 빈의 "아르누보(Art nouveau)" 스타일에는 보다 차분하며 기하학적인 문양과 소재가 더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세 번째, 클림트: 황금기/ 클림트는 빈 분리파 전시관 벽면에 <베토벤 프리즈(1902)>라는 작품명의 벽화를 제작하였습니다. 벽면을 황금으로 도색하여 장식주의의 특성을 더욱 강조했으며 이 시기에 그의 화풍은 신고전주의에서 상징주의로 진화하게 됩니다. 황금 장식과 원근법을 무시한 표현방식은 클림트 황금기의 주요 특징으로 대표작인 <아델르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907)>과 <키스(1908)>에도 잘 드러납니다. 

 

네 번째, 클림트와 자연/ 빈 분리파와 결별한 후 클림트는 자신의 회화 및 색채 연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새로운 주제로 풍경화를 선택했습니다. 이 시기 그의 작업은 인상주의 특징이 더해져 <양귀비 언덕(1907)>과 같은 작품으로 구현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호숫가 마을과 삼림 제대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건물, 꽃밭, 나무 둥치, 나른하게 누워있는 사람의 모습 등을 묘사한 방식과 이에 동반된 서사를 잘 살펴보면 기하학적 형태에 대한 그의 애착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에곤 쉴레/ 에곤 쉴레가 유럽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클림트와의 우정과 예술적 교감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쉴레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하고 개인적인 화풍 또한 발전시켰으며, 두 예술가가 서로에게 미친 영향은 이들이 그린 풍경화에서 분명하게 엿보입니다. 무엇보다 쉴레는 인체 구조를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인체를 기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세밀한 연구를 이어나갔습니다. 인체를 묘사한 작품과 초상화는 그의 개인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표현을 극대화한 초상화 시리즈가 지나간 후에는 서로 뒤얽힌 인체가 리듬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하며 관람객의 흥미를 유발합니다. 

 

여섯 번째, 클림트와 여성: 색채의 향연/ 클림트는 점점 황금기 화풍을 버리고 색채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유의 빛 표현을 통해 여성들을 화려하게 묘사하였습니다. 관능미와 당당함을 표현한 그의 여성 초상화에서는 의상과 패브릭이 배경 모티브와 혼재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호화로운 배경 때문에 때로는 그의 작품이 추상화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게 됩니다. 여성성에 대한 이러한 회화적 찬사는 클림트가 여성에 얼마나 매료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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